윤곽의 집적 또는 3차원, 좀 더 생생한홍지석 (예술학 / 단국대학교 연구교수)
오래 전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형상-배경의 법칙(figure&ground law)’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형상'과 ‘배경’으로 나누어 지각한다. 그것은 맥락(배경)으로부터 대상(형상)을 끌어내는 인간지각의 경향을 가리킨다. 이 때 형상은 앞으로 나와 있는 것(전경)으로 보이며 배경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후경)으로 보인다. 그러면 어떤 것이 형상(figure)이 되는가?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형상의 자질들(이를테면 무늬가 있는 것, 둘러싸여 막힌 것, 둥글둥글한 것(凸)…)이 있다. 그리고 일단 어떤 것이 배경에 대해서 앞으로 돌출된 것(형상)으로 지각되면 그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된다. 가령 그것은 익명의 모든 것들을 압도하면서 ‘유명(有名)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른바 ‘형상-배경의 법칙’을 만든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에게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형상-배경의 경계, 곧 ‘윤곽(silhouette)’을 형상, 배경의 양자 가운데 어느 쪽에 귀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으나 의외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형상에 또 하나의 특권을 부여하는 식으로 말이다. 즉 윤곽은 ‘형상(대상)’에 속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윤곽은 형상에 분리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지 않다. 콘라드 피들러(Conrad Fiedler)의 말대로 “촉감은 대상에서 분리될 수 없지만 (화가의 손을 통해) ‘윤곽’은 독립된 것으로서 동일한 대상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윤곽을 거느리지 못하는 형상은 더 이상 형상일 수 없다. 윤곽선이 분명하게 그려질 때 우리는 맥락(배경)에서 분리된 대상(형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상에 속해있다고 여겨지지만 언제든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윤곽의 존재는 형상(대상)의 특권적 지위를 보증하면서도 또한 위태롭게 하는 것일 게다. 조재영의 작업은 일상의 사물로부터 그 사물의 윤곽(외관)을 추출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녀가 “포장”이라고 지칭하는 작업방식은 사물을 각 부분을 측정하여 얻은 수치들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그 수치들을 기반으로 종이를 재료로 하여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같은 기하학적 단위들-조각들을 제작하고 그 조각들을 조립해 나가는 방식으로 사물의 형태를 얻는다. “사물의 형태를 얻는다”고 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녀가 얻은 것은 사물의 윤곽이다. 여기에는 본래의 대상이 지니고 있는 질적(정서적), 물리적 특성들이 배제되어 있다.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알맹이가 없는 커버”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이른바 ‘포장’ 작업은 주형작업(casting) 일반과는 변별된다. 주형작업 특유의 원본에 대한 모종의 강박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조재영의 형태들(윤곽들)은 처음부터 원본-대상으로부터 해방될 계기를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로부터 두 가지 방향의 전개가 가능하다. 하나는 대상으로부터 얻어낸 윤곽들, 조각들을 대상-원본의 구조적 양상과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여 대상-원본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들’을 얻는 경우다. ‘Toward a complete sphere’(2014)가 예가 될 것인데 여기서 축구공에서 추출한 윤곽, 조각들은 축구공과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었다. 그것들은 이선영의 표현을 빌면 “축구공으로서의 구조적 조건은 갖추었으나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개별 사물이 아닌 맥락, 즉 개별사물들이 뒤섞여 있는 상황으로부터 윤곽을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Temporary Construction’, ‘Flexible combination' 연작들에서 우리가 보는 바, 종종 그녀는 한정된 공간에 온갖 사물들을 쌓아서 얻는 상황의 전체 윤곽(외관)에 매료되는데 그 윤곽은 그녀의 작업방식으로 능히 포착할 수 있다. 형상 내지 대상(성)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윤곽들은 이제 대상들을 아우르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집적(조립)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방향을 추가해야 한다. 그것은 ‘사물’(대상)이 아닌 ‘상황’의 윤곽을 추출하는 작업들에서 이미 예고된 바,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는 네거티브 공간의 윤곽을 추출, 포착하는 작업들이다. 계단이나 기둥을 감싸는 공간에 가시적 윤곽과 부피를 부여한 'Through another way' 연작이 그 예일 텐데 여기서 윤곽은 과거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대상(형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경에 속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대상(형상)으로부터 해방된 윤곽! 조재영의 작업에서 이제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윤곽들은 (재)조립되어 지금껏 여타의 화가, 조각가들이 그려왔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펼쳐 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업은 과거 대상(성)으로부터 분리된 또는 해방된 ‘선’과 ‘색’을 손에 넣고 새로운 세계를 꿈꿨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입장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많은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선과 색으로 구성된 ‘추상’의 세계로 나아갔듯 지금 조재영은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윤곽들을 가지고 추상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형태들을 제작한다. 실상 조재영의 종이로 제작한 가벼운 형태들은 뒤집어 놓기만 해도 대상(원본), 형상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물론 우리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그 형태는 낯설다. 종종 자신이 제작한 형태들에 조재영이 'Monster'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게다. 그런데 ‘Monster’, 즉 조재영의 '괴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일단 윤곽을 떼어내는 방식으로 형상(대상)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해체적이다. 또한 (배경으로부터 분리된) 형상은 통상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는 점에서 조재영式 형상의 파괴는 이름, 또는 명명(命名)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의미체계에 대한 공격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대상을 제한하고 규정하며, 불변하는 실체로 만드는” 기존의 언어, 인식, 가치체계에 대한 거부감이 짙게 드러나 있다. 물론 조재영의 작업은 뭔가를 만들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해체 그 이상이다. 의미론의 수준에서 그 ‘뭔가’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포괄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ambiguous) 생겼다. (작업노트를 보건대) 조재영은 그 애매하게 생긴 것으로 “분별로 확장되기 직전”의 순간 또는 “기존의 인식은 무력해졌으나 새로운 인식은 확고해지지 않은” 어떤 찰나를 시사하고(가시화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한” 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조재영의 애매모호한 형태는 들뢰즈가 말했던 ‘크리스탈 이미지’ 같은 것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이선영의 비평텍스트의 한 구절이 논의에 보탬이 될 것 같다. 이 비평가는 이렇게 말했다. “관념이 아니라 지각이나 경험 같은 실재적 과정을 중시하는 점은 조재영의 조각이 가지는 현대성이다” (이선영, 『알맹이 없는 더 충만한 세상』, 2014) 이선영의 발언은 꽤 설득력이 있는데 왜냐하면 나는 조재영의 작업이 개념적으로 지각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지각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조재영의 작업 앞에서 나의 몸은 자꾸 그녀의 작업이 전개된(진행된) 절차를 추적하게 된다. 그것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내 몸의 정면으로 돌출했다가 이내 오른쪽 아래 40도 방향으로 선회하고 다시 위쪽 아니 왼쪽 20도 방향으로 직진했다가 아래 오른쪽 60도로 꺾인다. 이렇게 열심히 묘사했건만 나의 서술은 조재영의 작업을 포괄하기에 역부족이다. 내게는 그녀의 작업을 묘사할(describe) 언어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을 묘사하려고 애쓰면서 조재영의 몸의 궤적을 따라 내 몸, 내 지각을 활성화시키는(activate) 바로 그 순간에 그 작업의 진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순간에 나는 아무튼 인식과 개념으로 덧칠된 3차원이 아니라 글자 뜻 그대로의 3차원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그것은 전혀 새로운 생생한 공간 경험이다. 다시 이선영을 인용하면 이 비평가는 조재영의 작업이 “허무주의가 아닌 열린 인식체계를 지향한다”고 썼다. 아마도 ‘열림’이라는 말은 현재로서는 조재영 작업과 그 작업이 제공한 ‘생생한 경험’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하지만 ‘열림’이라니! 그것은 내가 경험한 새로운 공간을, 그리고 새로운 운동을 표현하기에 얼마나 투박하고 무력한 언어란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