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는 더 충만한 세상미술평론가 이선영
‘U에 대한 A의 차집합(The Relative Complement of A in U)’라는 부제로 열린 조재영 전은 전체(U)에서 무엇인가 빠진(-A) 나머지를 주제로 한다. 작가에 의하면 A는 ‘세계 안에서의 지극한 순조로움’, ‘견고한 틀과 당연함’을 말한다. 작가는 한정된 전체(U)라는 무한의 차집합에서 또 다른 무한을 본다.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을 주인공으로 전면화한다. 핵심은 관객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유령 같은 것이 되며, 주변적인 것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형태화된다. ‘차집합’으로 지시되는 타자적 이질성을 조형적으로 가시화하는 조재영의 방식은 사뭇 엄밀하다. 전시장에는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기하학적 형상들이 우연히 던져진 듯 놓여있다. 전시 작품들은 느슨한 연결망을 가진다. 어떤 도면으로부터 시작되었을 조재영의 기하학은 이상적인 광학적 질서가 투사되는 반듯한 기하학이 아니다.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하고 비가시적인 맹목(盲目)적 기하학이며, 추상적이 아니라 촉각적인 기하학이다. 이진법에 의해 모든 것이 플로차트로 그려지는 시대에, 작가는 1과 2사이에 있는 무수한 소수점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하나의 물병도 수학적으로 따지면 인식의 스펙트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남다른 인식의 스펙트럼은 전통적 조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덩어리보다 그것을 싸는 표면, 또는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정교해졌다. 덩어리는 하나지만 껍데기는 많을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러한 다양성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폄하되었지만, 바야흐로 하나의 본질이란 것이 의심에 붙여지는 시대가 왔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3차원적 다면체(polyhedra)들은 꽤나 까다로워 보이지만, 확실한 무엇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한다. 거기에는 표상으로부터 탈주, 그리고 중심 있는 구조를 해체하는 차이적 관계의 놀이가 있다. 이름붙이기 힘든 이 모호한 사물들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그 기원은 이상적인 플라톤적 기하학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일상에 속하는 물건들이다. 정상적인 사물의 질서는 살짝 비틀려 있다. 무거운 것은 가벼워지고, 안쪽은 바깥으로 까발려지고, 부정은 긍정이 된다. 거기에는 기준 자체를 다르게 적용시켜 배치된 또 다른 질서, 현실의 어떤 공간과 닮았는데 어슷하게 다른, 상황 논리에 따라 가변적인 기하학이 있다. 재료의 눈속임과 표면에의 강조, 관객의 운동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전개되는 지각적 체험 등이 두드러진다. 작업실 계단이나 기둥으로부터 시작된 작품 [Through another way]은 무엇인가 쑥 빠져나간 나머지 공간(negative space)이 기념비적으로 자리하면서 색다른 공간체험을 야기한다. 원래 사람이 통과하던 빈 공간은 판지와 나무로 형태화 되었고, 발을 디디며 올라가던 계단은 허공이 되어 관객이 통과할 수 있게 했다. 캔버스에 벽지 문양을 그려 파티션처럼 공간에 세워 놓은 작품 [Folding Walls]는 그림이라는 환영을 담아왔던 오랜 관념적 틀을 사물화 한다. 캔버스는 그림이자 가변적 공간이 된다. [완전한 구(球)를 향하여]는 6각형 20개와 5각형 12개로 이루어진 축구공의 전개도를 따라 만든 것이지만, 재료를 달리하여 그 모습이 낯설다. 축구공으로서의 구조적 조건은 갖추었지만,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내재적 결정 요인만을 고려하는 닫힌 형식을 거부한다. 가변적 상황이 강조되는 작품에서, 형태를 바꾸는 이질적 요소는 안이 아닌 바깥에 있다. 차집합은 바깥의 또 다른 이름으로 다가온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가 예시하듯이, 체계의 완결성을 자신하는 형식을 변화시키는 요인은 체계 내부에 있지 않다. 2층에 놓인 작품 [공기의 무게]는 무게에 따라 각이 결정되는 추이다. 가장 부피가 적어서 공기를 가장 많이 포함하는 것이 가장 무거운 추처럼 연출된 이 작품은, 부피가 아니라 공기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예기치 못한 서열을 보여준다. 모순적인 무게 설정은 부피가 아닌 공기를 기준으로 하면 논리적인 것이 된다. 작품 [Monster]에서 변이는 예측 불가능한 괴물의 노선을 따른다. 다른 전시에서 사용된 것의 일부를 잘라내고 덧붙이는 과정을 통과한 그것은 다음 전시에서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할지 예측불가이다. 그것은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다시 엮어 쓰고 해석될 수 있는 텍스트 같은 방식이다. 작품의 소비에서 발생하는 수동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늘 상 새롭게 짜여 지는 ‘텍스트의 쾌락’(롤랑 바르트)을 야기하는 과정은 작가 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해당된다. 상황과 상태, 과정과 흐름을 가시화 하는 이 작품은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 그자체가 본질을 이룬다. 무에서 유의 창조나 영원성 같이, 아직도 예술에 남아있는 신학적(그리고 그것의 변형인 관념론) 잔재를 거부한다. 종이로 만들었지만 견고해 보이는 [Monster]에는 전체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 위치가 없다. 그것은 시공간의 축을 따라 변화하며, 눈을 속이는 재료사용은 안과 밖 사이의 연속적 관계도 단절시킨다. 연속성에 바탕 하는 상식적 질서 곳곳에 단층을 형성하는 작품에서 어떤 정합적인 이야기(내용)를 읽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이 서사라면 산문이 아니라, 시여야 할 것이다. 조재영의 작품은 물질이나 개념에 있어서 논리적 투명성을 전제하는 근대적 ‘이성의 조각이 상황의 조각으로 바뀌는’(로잘린드 크라우스) 현대조각의 흐름에 속한다. 일상적 세계의 좌표축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수직/수평에 근거하는 데카르트적 공간체계이다. 이러한 중심 집중적 체계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조재영은 차집합을 통해 안정감을 주는 그 무엇을 빼내려 한다. 핵심이 빠진 그것들은 해체와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안정적 질서야말로 죽음과 가까울 수 있다. 차집합의 개념을 통해 방점이 찍힌 것은 닫힌 한계가 아니라 열린 경계이다. 고정된 관념적 질서는 실재적 과정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것은 정점이 아니라, 시간의 추이에 따른 움직임을 강조함으로 가능했다. 시간성은 하나의 중심을 향한 전진보다는 유쾌한 혼돈 같은 모호한 체험을 야기하곤 한다. 주체 바깥에 작품을 놓으려는 태도, 관념이 아니라 지각이나 경험 같은 실재적 과정을 중시하는 점은 조재영의 조각이 가지는 현대성이다. 이러한 현대성은 무기력한 흩어짐이 아니라 다중심성을, 느슨한 해체가 아니라 재구축을, 무정부주의가 아닌 또 다른 질서를, 허무주의가 아닌 열린 인식체계를 지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