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진 시간의 장소들
유 진 상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그 곳에는 끝이 막힌 낭하들,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곳에 나 있는 창들, 감방이나 우물로 뚫려있는 현란한 문들, 아래를 향해 나있는 계단들과 난간이 있는 거꾸로 된 믿을 수 없는 층계들이 즐비했다. 한 고색창연한 벽의 측면에 하늘거리며 걸려 있는 또 다른 층계들은 원형 지붕의 어두침침한 꼭대기에서 두 세 차례 원형을 그리면서 그 어떤 곳에도 다다라 있지 않은 채 끝이 나 있었다.”(<죽지 않는 사람들>, 보르헤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들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우주상수들 중 하나라도 바뀐다면 우주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할 것이다. 예컨대, 빛의 속도가 조금만 달랐다고 하더라도 시공간은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불변하는 것, 영원한 것, 무한히 진리인 것, 그것을 우리는 이상향, 혹은 낙원이라고 부른다. 영속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단지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면, 현실이 언제든지 붕괴되거나 대체될 수 있는 잠재적 사건일 뿐이라면 그러한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믿음은 아주 가느다란 윤곽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재영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칙들과 그것의 가시적 표상을 다룬다. 다만 여기서 원칙들은 다소 변형된 것, 현재로부터 이탈된 것,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들이다. ‘미세하게’라고 기술하는 이유는 외양이 나타내는 것이 원칙의 떨림에 대한 징후적 변형이기 때문이다. 그가 다루는 대상들은 ‘정상’과 소멸 사이의 가느다란 공간들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들은 현실이 해상도를 잃고 기하학적 도형들로 환원되거나 물질들이 연금술적 영혼의 상태였던 원형적 단계로 되돌아가기 전의 불안정하고 상호 교환이 가능한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이번 전시 <낙원 아래에서 Under The Paradise>에서 조재영은 완벽한 세계, 세계의 이상성에 이르기 위한 과정 속에서, 그 이전에 존재했을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상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은 세계 속에서 이상성을 뺀 나머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차감이 세계를 불안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언어는 대상을 잃고 사물은 얼어붙는다. 관계는 탈선을 반복하고 의식은 혼돈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시선 속에서 이러한 차감은 새로운 시작과 순환들, 끝없이 회귀하는 순간과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의 계기가 된다. 낙원은 ‘저 쪽’ 혹은 ‘저 위’에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의 부재로 인해 우리가 머무는 세계 속에는 그 부재의 위치로 향하려는 의지와 방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낙원과 접하는 면들은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아직 발견한 적이 없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우리의 언어와 의식에 도전하는 미증유의 형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로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바우>를 들 수 있다. 1923년부터 37년까지 제작된 이 독특한 작품은 슈비터스 자신의 방을 다차원적 공간으로 보일만큼 복잡한 다면체들로 채워 넣은 것이다. 슈비터스는 주로 폐품이나 값싼 재료들을 이용하여 작업했는데 이는 당대의 예술가가 처한 어려움 뿐 아니라 표현의 유연성과 자유로운 사고의 전개를 위한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조재영 역시 작품제작에 있어 가볍고 변형이 쉬운 골판지나 합판과 같은 재료들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 강한 현재성을 부각시킬 뿐 아니라 작업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재료가 허용하는 가변적 시간성, 즉 제한 없이 수정과 변경을 가능하게 하는 가역성은 작가가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새롭게 층위를 재구성하고 수정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작품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마치 ‘다면체’(manifold)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끊임없이 위상학적 배치를 바꾸는 양상이 그의 창작적 시간 속에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원시미술에서 뒤샹의 <큰 유리>에 이르기까지 비가시적 구조와 그것의 투사로서의 세계라는 이항적 관계는 예술작품이 작동하는 근본적인 동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안과 바깥, 위와 아래, 정신과 물질, 수학과 운동은 예술 뿐 아니라 문화와 문명을 지금의 형태로 구축해 온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조재영의 작품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현실로부터 그것의 시각적 요소들을 차감해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차감은 사물에 차감된 형태를 덧씌우는 형태로 전개되기도 한다. 이 역시 일단 이러한 덧씌우기가 이루어지면 원래의 내용물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차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감은 최종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혹은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의 특질이 소멸되기 직전까지 진행된다. 아마도 그 뒤에는 일종의 정적이나 배경음 같은 것이 존재할 것이다. 조재영의 다른 작품들, 예컨대 2009년에 제작한 ‘Object’ 연작이나 캔버스에 수를 놓아 글씨를 쓴 <What Am I> 같은 작품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최소한의 기억을 시각 뿐 아니라 촉각적인 방식으로 남겨놓는 행위이다. 2011년의 <Covers>와 <Moebius Strip>으로부터 시작된 골판지로 사물의 ‘껍질’을 만드는 작업은 2013년의 <Sculptures in the Blank>, 2016년에 제작된 <몬스터>, 2017년의 <앨리스의 방>에 이르기까지 작은 오브제에서 가구와 실내공간, 나아가 건축적 구조까지를 아우르는 확장적인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껍질’은 두 가지 의미를 떠올린다. 하나는 대상이 세계와 접하는 최소한의 경계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의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공유질 (shared matter)’이다. 이 공유질은 한편으론 단순화하면서 기하학적 면, 혹은 결정화된 형태로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론 화학적 결합처럼 다른 사물들과의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껍질들은 연사(連辭, syntagma)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그 자체로 체계(system)를 이룬다. 조재영에게 있어 사물의 외관이 지니는 이러한 조형적 양면성은 언어의 시적 연결(poetic association)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리적 양면성-시각적 기호로서의 문자와 소리-과 상통한다. <앨리스의 방>에서 조재영은 실내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가구들을 단순화하고 모듈화 한 뒤 그것들을 흡사 레고의 불럭들처럼 사용하여 공간을 재구성했다. 루이스 캐롤의 우화에서처럼 가구와 집기들은 동시에 입구와 출구이기도 하고 다른 차원들과 접해있는 사물들이기도 하다. 계단은 천장으로 나있으며 기둥은 위아래가 뒤집혀 있고 사물들이 놓인 자리는 그것들을 뒤덮은 다면체들에 의해 채워져 있다. 이 보르헤스적 다면체들은 내부를 알 수 없는 주사위들과 대답이 없는 질문들이 적혀있는 카드들이기도 하다. 각기 다른 ‘형이상학적이고 주관적인 물리학적 법칙’(뒤샹)에 지배되는 전시공간의 층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최소한의 장소, 원형, 혹은 사물과 정신의 낙원에 가까워지는 구조를 띤다. 개개의 작품들, 그리고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 전체가 그러하듯, 전시 역시 중첩과 차감, 그리고 다면체로의 변성을 수행한다. 부분과 전체가 상호 반영하는 만다라처럼 이 전시 역시 부재하는 중심을 향해 겹쳐져 있는 시간과 장소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